[사회과학] 자기가 존경하는 인물 조사 – 스티브 잡스의 삶인문사회레포트
스티브 잡스의 삶
`차례`
1. 서론 : 스티브 잡스는
2. 본론
2.1 스티브 잡스의 어린시절과 경영철학
2.2 APPLE I, APPLE II
2.3 매킨토시 스티브 잡스의 퇴출
2.4 PIXAR와 NEXT 전뇌적 경영
2.5 추락하는 애플로의 귀환
2.6 I POD, I POND
3. 결론 :스티브 잡스
`참고자료`
`표 차례`
`표1`ipod판매량
`그림 차례`
`그림1`매킨토시광고
1. 서론 : 스티브 잡스는
최초의 3D 애니메이션으로써 3억 6천 200만 달러라는 큰 흥행 이익을 낸 토이스토리를 제작한 사람은 누구인지 아는가 당시 타 회사 MP3 보다 훨씬 뛰어난 5GB와 가지고 다니기 간편하게 만들어진 I POD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아는가 지금부터 이 혁신적은 물건을 개발한 창조경영 CEO의 대명사인 스티브 잡스 라는 인물을 소개하겠다.
2.본론
2.1 스티브 잡스 의 어린 시절과 경영철학
스티브는 19…
스티브 잡스의 삶
`차례`
1. 서론 : 스티브 잡스는
2. 본론
2.1 스티브 잡스의 어린시절과 경영철학
2.2 APPLE I, APPLE II
2.3 매킨토시 스티브 잡스의 퇴출
2.4 PIXAR와 NEXT 전뇌적 경영
2.5 추락하는 애플로의 귀환
2.6 I POD, I POND
3. 결론 :스티브 잡스
`참고자료`
`표 차례`
`표1`ipod판매량
`그림 차례`
`그림1`매킨토시광고
1. 서론 : 스티브 잡스는
최초의 3D 애니메이션으로써 3억 6천 200만 달러라는 큰 흥행 이익을 낸 토이스토리를 제작한 사람은 누구인지 아는가 당시 타 회사 MP3 보다 훨씬 뛰어난 5GB와 가지고 다니기 간편하게 만들어진 I POD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아는가 지금부터 이 혁신적은 물건을 개발한 창조경영 CEO의 대명사인 스티브 잡스 라는 인물을 소개하겠다.
2.본론
2.1 스티브 잡스 의 어린 시절과 경영철학
스티브는 1995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폴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스티브는 열 살이 되면서 전자기기나 회로 등에 대하여 본격적인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상상력을 동원해 그 분야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잡스가 고등학생이 되던 무렵 잡스와 같은 취미를 가진 워즈니악과 차고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둘은 전자 쪽으로 관심이 많아 차고에서 연구를 자주 하였다.
그렇게 그 둘은 당시의 전화는 AT&T(미국전신전화회사)를 통하여만 전화를 걸 수 있었는데 그 둘은 장거리 전화통신 교환기에 특정 주파수를 흘려보내서 교환기를 속이고 공짜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블루박스’라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들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여러 자료들을 찾아 직접 다른 사람이 개발한 것들보다 우수한 것을 개발하였으며 또한 스티브는 편리성을 고려하여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작동할 수 있는 편리성을 가진 기계로 발전시켰다. 그는 대당 원가가 40달러뿐이 들지 않는 블루박스를 150달러에 팔고 …(생략)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300달러까지 받아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2.2 APPLE I, APPLE II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서 친구 워즈니악과 함께 apple1을 개발한다. 애플 1의 초기 가격은 500달러수준으로서 모니터도 없는 인쇄 회로기판 이였지만 큰 인기를 얻었으며 apple사를 설립할 자금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1977년 1월 3일 애플 컴퓨터 창업자들은 애플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여러 투자자들을 끌어 들여 혁신적인 컴퓨터 appleII를 개발한다. 이 컴퓨터는 잡스가 디자인을 중요시한 첫 번째 컴퓨터이자 완전한 컴퓨터였다. 출시 후에 단기간에 300대를 판매하였고 판매량을 appleI 보다 조금 많은 양만으로 추정하였던 apple사는 apple II 로 컴퓨터 시장이 포화될 때까지 판매를 하였고 1979년 여름 727만 달러의 주식을 세계 최대의 벤처회사들에게 팔았다. 잡스는 이때 보유 주식의 일부를 판매함으로써 24살 젊은 나이에 100만 장자가 되었다. 그 후에 apple사는 appleII 프로그래밍 언어와 확장 가능성 단순계산 프로그램인 ‘비지칼크’ 라는 프로그램들을 appleII에서만 작용하게 만들어 세계의 컴퓨터시장을 사실상 점령하였다 1980년에는 판매량이 2배로 늘어나서 애플과 경쟁할 회사는 없어졌다.
2.3매킨토시
매킨토시는 애플II이후 애플사에서 준비한 컴퓨터 중 하나이다. 일반 소비자에게 사용이 쉽고 가격이 낮은 컴퓨터를 보급하고자 했던 애플 직원 제프 라스킨에 의해 시작됐다. 허나 그는 1981년 회사와의 견해차이로 떠나면서 스티브가 맞게 된다. 그 후 매킨토시 128k는 1983년 10월에 언론에 소개됐고, 12월에 18쪽짜리 소책자와 함께 여러 잡지에 소개 되었고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의 성공을 위하여 모든 미국인이 시청했던 슈퍼볼 VXIII의 3쿼터에 광고시간 1분이라는 큰 시간을 가지고 광고를 내었는데 그 광고는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인 광고로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저녁 뉴스에 나올 정도의 히트를 쳤다. 광고를 빼고도 다른 매체에서의 언급으로 엄청난 이득을 얻음으로써 이 계획을 추진한 스티브의 입지 또한 상승하였다. 그러나 1984년에 애플의 경쟁사인 IBM사가 IBM PC-AT를 출시함과 1985년 1월 Microsoft사의 Microsoft Word가 출시됐다. 이 컴퓨터 들은 다름 프로그램과의 호환성이 좋은데 비하여 애플의 매킨토시는 애플의 프로그램이 아니면 다른 프로그램들과의 호환성이 잘 맞지 않았고, 매킨토시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리사 컴퓨터와의 경쟁으로서도 애플에 타격을 주었다. 이로 인함과 맥 개발과 정중 애플사의 전문 경영인으로 스카우트되었던 펩시와 스컬리와의 갈등 등으로 스티브 잡스는 인생의 반전기인 애플에서의 퇴출을 당한다.
2.4 NEXT 컴퓨터 설립과 PIXAR의 인수
1986년 말 스티브 잡스는 apple사를 완전히 떠난다. 그가 지닌 600백만 주가 넘는 주식을 팔고 단 1주 만을 매년 경영보고서를 받아보려고 남겨놓았다. 그리고 잡스는 무언가를 하려고 여러 가지에 손을 데는데 정치에도 손을 데었으나 잡스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언가를 창조하고 개발 하는 것 이라는 것을 알고 그는 ‘넥스트’ 라는 회사를 다시 설립한다. 그러나 잡스는 애플에서의 실패에 대하여 충분한 반성이나 치밀한 계획 없이 시작하였다 잡스는 애플사에서 데려 온 유능한 기술자들과 새로운 컴퓨터 개발에 몰입을 하여 넥스트 큐브를 출시한다. 그 당시에는 저장장치가 발달 하지 못하여서 350MB의 광자기디스크를 사용한 뛰어난 저장능력과 음성인식 기능 등으로써 이목을 받았고 잡스 또한 출시 며칠 전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컴퓨터가 달라 질 것 입니다” 라고 발표하며 잡스의 특기인 창조적, 혁신적 상품 출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스티브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렀다. 다른 컴퓨터보다 높은 가격과 기존의 다른 기종과의 호환성 문제 그리고 넥스트가 아직 시장에서 생소 하다는 점 때문에 또 한 번의 쓴 실패를 하였다. 그러나 잡스의 도전은 계속 되었다. 그는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가 루카필름즈를 매각 한다는 소식에 흥미를 가졌다. 특히 선명한 디지털 화면들과 3영상물들에 대하여 크나큰 매력을 느꼈다. 그는 오랜 협상 끝에 3000만 달러를 제시한 루카스에게 1000만 달러에 인수하며 회사명을pixel(화소)+art(예술)융합한 ‘PIXAR’라고 바꾸고 5분짜리 3D애니메이션인 ‘틴토이’를 제작함으로 써 영화계에 발을 들려놓는다. 이 작품은 1989년에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수상작으로 인기를 얻고 이 추세를 계속 이어서 ‘디즈니’사와 함께 3D영화를 제작하기로 한다. 이전까지 2D만 제작하던 ‘디즈니’사는 1991년부터 ‘픽사’와 함께 3D애니메이션에 들어가는데 무려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제작에 매달렸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자금 지원이 있었지만 넥스트컴퓨터와 픽사의 자금 사정은 많이 나빠졌고 자신이 소유한 몇 몇 회사를 처분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1995년 12월 23일 영화가 개봉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토이스토리’이다. 장편 3D애니메이션으로서는 최초였으며 엄청난 흥행으로 개봉 첫 주 만에 총 제작비에 가까운 2900만 달러라는 수입을 올렸고 그 해 세계 전역에서 2억 50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 후 비디오 판권으로도 1억 달러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픽사의 성공은 스티브의 창조성과 기술결합의 성과이다. 1996년 2월 스티브 잡스는 인터뷰에서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분야에서 일하려 한다. 그러나 이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장애물이 있다. 첫 번째는 창조성이고 두 번째는 기술이다. 픽사는 기술을 사 들여 만들어진 회사가 아니다. 지난1년 간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다. 우리는 1년간 쌓아 올린 우리만의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고 현재로서는 그에 견줄만한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디즈니는 창조적인 조직이지만 기술이 없다. 그 누구도 그 기술을 픽사에서 가지고 갈 수 없다. 세 번째 장애물은 이 들의 결합이다. 이 두 가지 문화, 즉 기술과 창조성을 결합시키는데 우리는 10년이 걸렸다. 이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해 낼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데 10년이 걸리다니. 어느 누구도 이런 시도를 해 본적이 없을 것이다.”
스티브는 토이 스토리를 제작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경영철학 중 하나인 히트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구를 목표고객으로 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달 할 것인가 라는 코넵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또한 어린이와 여성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술보다는 감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4 년 동안 디즈니와 일을 하면서 우뇌경영 즉 디자인은 기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킨토시때 기술과 우수성만을 주요시한 좌뇌 경영만을 하였다면 이번 디즈니와의 일로 창조적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전뇌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1995년 12월에 픽사의 주식이 공개되었다. `토이스토리`가 개봉한지 1주일 뒤였다. 1주당 39달러에 마감되었고 스티브 잡스는 다시 억만 장자가 되었다. 픽사의 성공은 애플의 경영진에게도 스티브 잡스의 존재를 다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스티브는 애플에 복귀하게 된다.
2.5 추락하는 애플로의 귀환과 맥 컴퓨터개발
애플은 1998년에 넥스트 컴퓨터를 인수하고 잡스는 300명의엔지니어들과 함께 애플 고문으로서 복귀를 한다. 잡스가 복귀했을 때 는 애플사의 손실은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주가는 주당 18달러 정도였다. 이는 애플 이사회에서 선임 하였던 존 스컬리나 마이클 스핀들러, 길 아멜리오의 회사 점령 실패와 경영실수로 인한 것 이였다.
잡스는 1999년에 애플의 임시CEO로 결정된다. 스티브는 1달러의 연봉으로 계약을 하고 애플경영에 돌입한다. 창조적 경영의 시작이다. 그는 회사의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자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윈도우 개념이나 인터페이스 기술에 대하여 특허소송으로 빌 게이츠에게 기술사용 대신 1억500만 달러의 투자를 받는다.
그는 개발 프로젝트 중 70%를 중단시키고 먼저 아이맥 개발에 돌입을 한다. 그는 사람들이 CD를 가지고 다니며 인터넷을 즐긴다는 것을 공략하였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자 당시에 많이 쓰이던 디스켓을 없애버리고 CD롬을 설치하였다. 잡스는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고 물건을 만들 수 없다. 그 제품이 완성될 때쯤 이면 이미 고객은 다른 새로운 제품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고객이 원하는 것을 만들고자 하였다.
1999년 드디어 1300달러의 아이맥이 출시되었다. 누구든 플러그만 꽂으면 작동되는 컴퓨터였다. 아이맥은 2 주 만에 27만 8천대를 팔고 1 년 만에 200만대가 팔렸다. 스티브의 복귀 작으로 큰 홈런을 날린 것 이였다. 스티브는 20억 달러도 안 되던 회사의 총자본을 2 년 반 만에 8배가 넘는 160억 달러 증가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2.6 I POD IPHON
애플이 MP3 플레이어를 처음으로 만든 회사는 아니다. 한국의 레인콤 에서 만든 아이리버 (iRiver)가 미국 시장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또 음반시장에서는 소니가 컬럼비아 음반사를 인수하여 소니뮤직으로 이름을 바꾸고 미국 시장에서 발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형성돼 있는 것으로 보였던 디지털 음악 시장에서 소비자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기존의 MP3는 조작법도 어렵거니와 카세트레코더나 CD플레이어를 작게 만들었다는 것 말고는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스티브 잡스는 MP3를 단순한 음악기기가 아닌 디지털 뮤직 시스템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필립스의 하드웨어 기술자였던 토니 파델을 영입한 30명가량의 개발팀은 아이포드의 개발에 매달렸다. 빠른 시간 내에 개발을 하기 위해 애플은 매킨토시 때와는 달리 핵심 콘셉트와 디자인만 내부에서 결정하고 기술적인 부분은 전문기업에게 맡기는 방법을 택한다. 이미 전문 업체에서 개발한 플랫폼을 선택함으로써 애플은 제품의 소형화, 부품의 선택, GUI부분에서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또한 음질을 높이고 인터넷과의 연결 기능은 강화했지만 어떤 것은 작고 얇은 디자인을 위해 과감하게 제거했다. 대표적인 것이 녹음이었다. 이렇게 아이포드의 핵심 콘셉트를 유지하면서 기술개발은 외부 전문기업을 활용하는 마법과 같은 네트워킹 개발을 채택함으로써 애플은 8개월 만에 최고 히트작 아이포드를 만들어냈다.
애플은 1000달러나 1만 달러대의 컴퓨터를 만들었을 뿐, 100달러대의 MP3와 같은 대중적인 제품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경험은 있지만 음악 콘텐츠와 같은 콘텐츠 산업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애플은 순식간에 MP3 플레이어와 음반시장에서 리더로 부상했다.
이는 컴퓨터와 MP3, 음반을 하나로 이어주는 새로운 가치사슬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애플은 MP3를 단지 음악기기가 아니라 IT기기로 보고 인터넷과 연결하여 음악 산업의 가치사슬을 새롭게 만들었다. 음반회사와 온라인 판매계약을 맺어서 음원을 확보하고 뮤직스토어를 만들었다. 음악애호가들은 자신의 컴퓨터에 MP3파일을 다운받고 편집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 아이튠스를 설치했다. MP3를 가진 고객이 온라인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선택하고 다운받을 수 있도록 파이프라인을 마련해준 것이다.
또 하나의 파이프라인은 포드 캐스팅이다. 애플은 아이포드를 이용하여 개인방송국을 만들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를 지원했다. MP3가 단순히 음악을 듣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의 음성이나 음원을 방송할 수 있는 도구가 되도록 한 것이다. 아이포드를 구매한 고객의 60-70퍼센트가 포드 캐스팅을 이용할 정도로 현재 보급량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애플은 이처럼 MP3를 이용하여 자신의 콘텐츠를 만들고 방송처럼 송출과 수신을 할 수 있도록 눈에 보이지 않는 파이프라인을 깔아놓았다. 결과적으로 포드캐스팅이나 아이튠스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그것은 또 다시 아이포드의 매출로 이어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것들로 아이포드는 2001년10월 23일 첫 아이포드 출시로부터 2007년 4월 9일 까지 총 1억대의 아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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