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교육 심리학 – 프로이드 심리학인문사회레포트

[사회과학] 교육 심리학 – 프로이드 심리학인문사회레포트

교육 심리학- 프로이드 심리학

목 차

1. 자아와 본능
2. 초자아의 개념
3. 자기방어기제
4. 억압
5. 반동형성
6. 투사
7. 퇴행과 고착
8. 승화와 치환
9. 외디프스 컴플렉스
10. 리비도
11. 유아성욕
참고도서
1. 자아와 본능
“자아”라는 개념은 모순과 논란으로 가득 차 있다. 프로이드가 최근에 발표한 그의 논문1)에서, 신경증적 갈등이 “자아”와 본능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아”는 본능적인 욕구와는 서로 다르거나 또는 정반대의 개념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번에는 “자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로 구성되었는가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생긴다.
원래 “자아”는 리비도가 아닌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순수한 자기보존적 욕구에 기여하는 비성욕적인 부분을 뜻한다. 그러나 나르시즘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자 전에는 “자아”로 간주되었던 대부부ˆŠ 현상들, 즉 자기애적(自己愛的)인 관심, 자기확장욕, 특권의식, 자존심, 이상, 창의성 등이 그 성격상 리비도적인 것임이 밝혀졌다.2)그 후 우리의 도덕적 목표나 행동 또는 감정을 조정하는 내적 규준(內的規準, inner norms)이라는 뜻의 “초자아”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는데, 그것 또한 그 성격상 리비도적인 거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초자아”는 나르시즘적인 리비도, 파괴본능, 과거의 성적 애착심의 부산물 등의 혼합체이다). 따라서 “자아”와 본능을 서로 상반되는 한 쌍의 개념이라고 한 프로이드의 말은 명료성을 상실하는 결과가 되었다. 우리는 프로이드가 쓴 여러 가지 글에서 수집한 자료를 통해서 그가 “자아”라는 개념 속에 포함시킨 현상들의 개략거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말한 “자아”는 다음과 같은 무리의 요인들을 뜻하는 것 같아 보인다. 즉 나르시즘적인 현상, 본능 중에서 탈성욕화(脫性慾化)된 부수물들(예를 들면 승화나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에 의해서 발전된 특성…(생략) 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정도로 변용(變用)시킨 본능적인 욕구들(예를 들면 근친상간의 성격을 띠지 않는 성욕 등)과 같은 것들이 이에 속한다.
이런 뜻에서 보면 프로이드가 말한 “자아”는 그 자체가 본능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자아”는 본능과 양극적(兩極的)인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떤 글에서 선언하고 있듯이, “본능”이 변용되지 않는 본능적 욕구의 총체라 하면, “자아”는 의식적으로 조직화한 그 일부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3)자아의 본질적인 특성은 그 취약성에 있다. 모든 에너지원은 “본능”에 있고, “자아”는 그로부터 빌려 온 힘에 의존한다. “자아”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는 전적으로 “본능”이나 “초자아”에 의하여 결정된다. 본능적인 욕구는 “초자아”나 외부 세계와 위험할 정도로까지 충돌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아”는 “본능”, “초자아” 그리고 외부세계와 삼중적인 의존관계에 있으며, 그 사이에서 중개인과 같은 행동을 한다. 그것은 “본능”이 추구하는 거을 만족시켜 주려 하는 한편, “초자아”가 금제하는 바에 복종하려 한다. 그 취약성은 마치 자기 자본이 없는 상인이 어느 한쪽편 사람으로부터 이익을 얻으려고 하면서도, 그 반대편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려 하지 않는 것과 흡사하다.
2. 초자아의 개념
프로이드의 “초자아”라는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주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어떤 종류의 신경증 환자들은 특별히 높고 경직된 도덕적 규준에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들의 삶의 동기는 행복의 동기는 행복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방정(方正)하고도 완벽한 삶을 유지하려는 열정적인 욕구인 것 같다. 그들은 일련의 “~해야만 한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에 의해서 지배되며, 완벽한 직업인,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능력, 빈틈없는 판단력, 존경받는 남편, 흠잡을 데 없는 딸, 모범적인 주부 등을 추구한다.
그들의 강박적인 도덕적 목표는 실로 가혹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어떤 불안도 비록 그것이 뿌리깊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요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에는 불안이나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도덕적 요구에 집착하는 신경증 환자들은 현재의 실패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에 있었던 실패의 경험까지도 되새기면서 자신을 질책한다. 이런 삶들은 비록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그런 불우한 환경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었다고 느끼며, 어떤 냉대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거나, 불평을 하거나, 화를 내는 일이 없이 꿋꿋이 이를 참아낼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모든 책임을 자신이 떠맡으려 하는 불합리한 태도는 어렸을 때 잘못 형성된 죄책감 탓이라고 너무 쉽게 간주되고 있다.
이 도덕적인 요구가 무조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만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사람인데도 그들 모두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그것 모두를 자기 탓으로 돌린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 환자 한 사람은 어떤 여자 친구에 대하여 내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상대해 본 바에 따르면 그 여자는 엄격하고, 이기적이며, 대수롭지도 못한 주제에 시기심만 강한 그런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기가 왜 그 여자를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분석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그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왜 그 여자를 반드시 좋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는 상대방의 성격에 상관없이 또는 사람들을 좋아하려 했던 것이 자신의 불문율이었음을 깨닫고 크게 위안을 받는 것 같았다.
이런 도덕적 기준이 강박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프로이드가 이른바 “자기소외(自己疏外)”라고 부른 그런 특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프로이드가 쓴 이 말은,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원칙을 세워 놓고, 그 문제에 관한 한 자신의 본심과는 관계없이 이 원칙에 맹종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물을 판단할 때에는 그들 자신의 호오(好惡)의 감정이나 가치관 따위는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런 경향은 그들이 자신의 본심에 따라 사리(事理)를 분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런 원칙들은 의심할 여지도 없고, 침해받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그들은 다만 이 원칙에 복종해야만 한다. 이런 원칙에서 조금만 벗어나는 것이 있어도 그것들은 의도적으로 합리화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죄의식이나, 열등감 또는 불안이 유발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떤 욕구가 의식적이냐 무의식적이냐를 따지는 것은 생각보다는 너무나 모호하여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야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의식하고 있지만, 그 야심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성격을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종종 불안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고는 있지만, 이 불안 때문에 그의 전체적인 삶의 패턴이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도덕적 완벽성을 추구하려는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든지, 또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욕구가 환자의 전체적인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성격과 정도, 그리고 환자로 하여금 그처럼 경직된 도덕적 기준에 집착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향으로 분석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모든 종류의 무의식적인 요인들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환자 자신이 이런 도덕적 기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또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고도 심오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제 3자인 의사는 어떻게 해서 이런 사실을 알아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서는 세 가지 유형의 근거자료가 제시될 수 있다.
첫째로, 어떤 사람은,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고, 또 납득할 만한 하 등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어느 경우에나 예외 없이 경직된 행동패턴을 보인다.
둘째로는, 환자가 가지고 있는 강박적인 도덕적 기준에서 조금만이라도 벗어나거나, 심지어는 그럴 가능성만 보여도 불안이나 열등감 또는 자책감 등이 유발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어떤 사람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남들이 자기를 욕하거나 불합리한 요구를 한다고 느끼는데, 실제로는 아무도 그를 욕하거나 그런 일을 강요하는 일이 없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이와 같은 태도를 형성하게 한 어떤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는데, 예를 들면 그의 이런 태도는 자기 자신을 힐책하고 비난하려는 태도가 밖으로 투사(投射)된 결과라고 추정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신경증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해 낸 것이야말로 프로이드의 탁월한 관찰력을 입증하는 많은 근거 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데 있다.
그의 본능이론을 근거로 해서 이를 설명하려 했던 프로이드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을 추구하려는 신경증적 욕구와 같은 강력한 힘이야말로 그 성격상 본능적인 것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 욕구를 본능과 그 변형물들이 복합된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그것은 나르시즘적, 마죠키즘적, 그리고 특히 파괴적 욕구의 혼합체이다. 그것은 금제와 복종으로 상징되는 부모에 대한 복합적인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뜻에서는 외디프스 컴플렉스의 잔유물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다만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즉, 프로이드의 “초자아”라는 개념은 리비도이론과 죽음의 본능이론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이 이론들을 받아들인다면, “초자아”에 대한 그의 견해도 수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프로이드의 이론들을 검토해 보면, “초자아”란 주로 금제의 성격을 갖는 내적 작인(作因, agency)이라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요지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모든 금지된 충동적 성향들, 특히 공격적인 것들을 빠짐없이 조사해서 가차없이 이를 처벌하려는 비밀경찰국과 같은 것이다. 프로이드는 “초자아”가 불안이나 죄의식을 유발하는 것 같아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그것이 파괴적인 힘을 부여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완벽을 추구하려는 신경증적인 욕구는 “초자아”가 가지고 있는 폭군적인 힘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초자아”에 순응해서 처벌을 모면하려고 좋건 싫건 간에 완벽을 추구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해 보자. 프로이드는 이상(理想)과 금제(禁制)와의 관계에 대한 통상적인 견해를 거부하는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흔히 금제는 마음속에 있는 도덕적 목표에 의해서 부과되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프로이드는 이 도덕적 목표를 새디즘적인 공격성의 결과로 간주하였다. 그는 “통상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이런 상황을 다른 우회적인 방향에서 보려고 한다. 즉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이상(自己理想)에 의해서 설정된 도덕적 기준이 공격성을 억제하는 동기라고 생각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향한 새디즘은 남들을 향해 발산되었어야 할 외향적 새디즘으로부터 그 에너지를 얻는다. 그는 남을 미워하고, 괴롭히고, 비난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괴롭히고, 비난한다.
프로이드는 이런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로 두 가지 관찰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한 가지는, 완벽을 추구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은 금제적인 내적 요구 때문에 질식상태에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프로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사람이 남들에 대한 공격적인 성향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는 점점 더 자기이상(ego-ideal)에 대하여 폭군적인 공격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관찰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지만, 그와는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두 번째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면서도, 남에게는 항상 관대한 것 같아 보이며, 자신에게는 자학적(自虐的)이라고 할만큼 엄격하면서도 남을 비판하거나 헐뜯는 일은 극구 삼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관찰사실 만으로는, 이것 또는 또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그것을 함부로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이와는 모순되는 또 다른 관찰 자료들이 얼마든지 있다. 표면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남들에게 엄격한 신경증 환자 중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엄격한 사람이 있으며, 남을 경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도 있고,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역시 자기 자신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도덕 또는 종교적 요구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잔혹행위는 또 어떠한가
프로이드는 “초자아”를 도덕적 요구, 특히 도덕적 금제의 내적 대리인으로 간주하였다. 이러 그의 견해 때문에 그는 “초자아”라는 개념을 양심, 이상, 그리고 그보다 더 엄격한 금제적 성격을 가진 정신적 요인들의 정상적인 활동과 근본적인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초자아”나 양심 또는 이상 등은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잔혹성을 방출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나는 정상적인 도덕과 완벽을 가장해 보이려는 신경증적 욕구가 서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자세히 논의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는 아직도 약간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규준이란 행하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는 교조적(敎條的)인 견해의 표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적인 일들을 정의하는 데 따르는 철학적인 복잡성을 피하여 문제를 보다 쉽게 표현하자면, 도덕적 규범이란 개개인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르려 하는 감정이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소외(ego-alien)가 아닌, 자아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것과 “초자아”는 외형상의 유사성이 있을 뿐이다. 완벽해 보이려는 욕구의 내용이 문화적으로 용인되어 있는 도덕적 가치와 일치하는 것은 단지 우연한 경우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은 아니다. 결벽증적인 목적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된 도덕적 기준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전혀 그 기능을 다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단지 도덕적 규범을 흉내내는 원숭이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들은 도덕적 가치의 모조품이다.
이 가짜의 도덕적 목적은 진짜의 도덕적 규범이나 이상과 일치하기는커녕 그 발전을 저해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온 그런 종류의 완벽성은 마음의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긴장 때문에 그가 스스로 채택한 그 자신의 기준일 뿐이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그에 불복(不服)하면서도 단 형식적으로 이 기준에 따를 뿐이다. 예를 들면, 그는 표면적으로는 남들과 친하게 지내지만, 사실은 이런 자신의 태도를-무의식적으로-부담스러워 한다. 남에게 무조건 친절하려 하는 이런 욕구에 뒤따르는 강박적인 요인을 극복한 연후에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정말로 남에게 친절하고 싶어하는지를 성찰(省察)할 수 있다.
완벽을 추구하는 신경증적 욕구에는 참된 도덕적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환자가 추구하거나 꾸며 보이려고 애쓰는 참된 목표는 아니다. 실질적인 도덕적 이슈는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은 신경증적 성격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불성실, 교만, 그리고 잘 위장된 잔인성 등에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성향들에 대하여 환자 자신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는 그저 어쩔 수 없이 그런 성향들을 발전시켜 왔을 뿐이다. 그렇지만 분석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런 문제들과 직면하지 않으며 안된다. 왜냐하면, 환자의 도덕성을 개선시켜 주는 것이 외사의 책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환자 자신이 그런 그릇된 성향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거짓된 성향들은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과의 원활한 인간관계를 저해하고, 최대한의 자기개발을 방해한다. 분석과정에서 이 단계야말로 환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것이지만, 또한 가장 강렬한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거짓된 허울을 포기하면 그것을 신주단지처럼 껴안고 있을 때 느끼던 거짓된 안전감만큼이나 큰 위안을 얻는데, 여러 가지 관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진실을 받아들였을 때 느낄 수 있는 실질적인 위안은 신경증적 도피를 통해서 얻는 자기 기만적인 안전감보다 더 절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자기방어기제
아기가 처음에 세상에 나오게 될 때 아기에게 있어서 출산은 이 세상에 태어난 최초의 강렬한 체험이었을 것이다. 외부로부터 아기의 장기관이나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자극이나 태내에서 외계로 나올때의 환경의 변화와 같은 압도적인 자극으로 말미암아 심적 장치가 상하게 되는 상황을 프로이드는 외상상황 또는 위기상황이라고 불렀다. 출산은 위기상황의 원형이다.
인생의 제 2위기상황은 아기가 자기 혼자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데서 생겨난다. 예를 들면, 유아는 배가 고파도 자기 힘으로는 먹이를 구하는 능력이 없다. 또한 부모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마한 자아가 발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유아는 증대해가는 욕동 에너지에 압도되어 자동적으로 불안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유년시절의 자동 발생적인 불안을 야기시키는 다량의 자극은 이드의 작용으로 야기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수반되는 불안이 작용하는 제 3의 위기상황과 초자아의 형성에 따른 제 4의 위기상황을 계속해서 거치면서 어느덧 아이는 위기상황의 출현을 미리 알아내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 심적 장치는 위기상황을 예기함으로 말미암아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불안을 느끼는 것도 또한 자아의 기능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간이 자아의 기능으로써 다가오는 위기상황을 예기하여 불안이라는 반응을 일으켜서 그 회피를 위하여 전력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면에서 보자면, 불안은 자아가 위기를 알려주기 위한 신호로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기되는 불안이라는 것은 불쾌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불안이 생기면 즉시 쾌감 원칙이 작용하여 이드 욕동 에너지는 필요한 에너지를 자아로 옮겨서 자아는 위기상황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행위를 중지시키거나 또는 위기상황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같은 불안 메카니즘은 결코 그 자체가 병리적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건강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경우에, 현실적으로 커다란 위기상황에 빠져 버렸을 때의 느끼는 불안과 위기상황을 예기하고서 야기된 불안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큰 차이는 그 불안의 강도에 있다. 물론 전자의 경우 불안이 더 강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 불안은 약하다.
자아가 위기상황을 접근의 신호로서 불안을 일으키고 이드의 쾌감 원칙이 그에 호응해서 위기불황에서 빠져나가려는 마음의 움직임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방어 메카니즘이라고 일컫는다. 방아 메카니즘은 무의식중에 영위되고 또 그 방어의 방법은 갖가지이다.

4. 억압
억압은 프로이드의 초기 이론에게 이미 방어 메카니즘의 중요한 것으로서 들고 있다. 그것은 성적 욕동이건, 공격적 욕동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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